은퇴 앞둔 수의사들 “준비 잘하고 있나”

50~60대 세대 급증 불구 대응책 전무…생애설계 및 멘토링 등 제도 마련 시급

2025-09-18     개원

 

전문직 사회도 고령화의 흐름을 피할 수는 없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의 18.4%로, 본격적인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이러한 인구 구조의 변화는 의료, 교육, 법조 분야는 물론 수의사 집단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농장동물 임상 분야의 수의사 평균 연령은 53.4세에 달하며, 개업 수의사에서도 50대 후반 이상이 다수를 차지한다.

문제는 은퇴 시점에 도달한 수의사 수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이들을 위한 제도적 은퇴 설계나 사회적 지원 체계가 사실상 전무하다는 점이다.
수십 년간 진료실에 머물던 이들이 은퇴를 맞이하더라도 병원을 어떻게 정리할지, 후계자는 누구로 세울지, 은퇴 이후의 소득과 건강은 어떻게 유지할지를 안내해주는 체계가 없다.

은퇴는 여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으며, 준비되지 않은 은퇴는 곧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한 수의과대학 교수는 “은퇴 즈음에 준비를 시작하면 조급함 속에서 계획이 제대로 수립되지 않는다.
적어도 5년 전부터 생애 후반기를 설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조언한 바 있다. 그는 특히 대체소득원, 건강관리, 일상의 루틴 재정비가 은퇴 이후 삶의 질을 좌우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재 국내 수의대 교육과정이나 대한수의사회, 지역 수의사회 등에서 은퇴 준비를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는다. 병원 정리나 후계자 승계조차 개별 수의사의 경험과 재량에 맡겨지는 상황이다.

미국수의사회 은퇴 어떻게 다루나
해외에서는 수의사의 은퇴를 제도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미국수의사회(AVMA)가 2022년 발표한 <Veterinarians’ Work-Life Experience> 보고서에 따르면, 수의사들이 은퇴를 결심하는 주요 이유는 ‘여가 시간 확보’(74.3%), ‘재정적 안정’(70.0%), ‘건강 유지’(63.2%)였다.
반면 은퇴 이후 겪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는 정체성 상실, 일상 루틴 붕괴, 소속감 부재가 공통적으로 지적됐다.

Merck Animal Health와 AVMA가 공동으로 발표한 2023년 수의사 웰빙 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수의사의 15%는 향후 2년 이내 완전 은퇴를 계획 중이다.
이들은 번아웃, 정신적 고립, 보호자와의 관계 단절 등을 퇴직 이유로 꼽았으며, 이에 따라 미국 내 일부 병원은 정신건강 상담, 재정 설계 교육, 경력 전환 워크숍 등을 포함한 통합 지원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이에 MentorVet, NAVC 등 전문 커뮤니티는 퇴직 수의사를 위한 멘토링 프로그램을 병행하며,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준비를 돕고 있다. 

국내 수의사 사회에는 아직 은퇴 설계의 기본 틀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 대한수의사회, 지역 수의사회, 수의과대학 어디에서도 생애설계, 병원 승계, 심리적 이행을 포함하는 공식적 은퇴 교육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 

병원 폐업 매뉴얼, 자산 정리 컨설팅, 후계자 연결 시스템도 부재한 상황이다. 이로 인해 많은 고령의 수의사가 막연한 불안감을 안은 채 진료를 계속하고 있다.

반면 공무원연금공단은 55세 이상 퇴직 예정자를 대상으로 생애전환 교육을 운영 중이다. 의료계 일부 병원에서는 정년 후 커리어 전환 교육이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OECD 역시 2018년 보고서 <Working Better with Age: Korea>를 통해 고령 전문직을 위한 생애 재설계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수의사 사회도 더 이상 늦기 전에 제도적 대응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은퇴는 개인 아닌 공동체 과제
수의사의 은퇴는 단순한 개인의 진료 종료가 아니다. 수의사라는 직업은 보호자, 환자, 병원 팀, 지역사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준비되지 않은 퇴장은 보호자와 환자에게 불안감을 주고, 후속 수의사와의 단절을 만들며, 의료서비스의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제는 수의사의 은퇴를 하나의 생애단계로 인식하고, 정책과 제도가 뒷받침하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오랜 기간 쌓아온 임상 경험과 관계 자산은 병원을 떠난 이후에도 멘토링, 교육, 지역사회 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역 수의사회 단위에서 생애설계 교육을 시작하고, 병원 승계 플랫폼을 도입하며, 은퇴 후 수의사의 경험을 후배들과 나눌 수 있는 멘토링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정신건강 관리와 사회적 소속감을 유지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이제는 수의사의 은퇴를 개인의 문제로만 둘 것이 아니라 공동체 차원의 과제로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