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일 원장 칼럼 ⑬] 동물병원에서

표준수가제, 과연 답일까?

2025-10-09     개원

최근 수의계 안팎에서 ‘표준수가제’ 도입 논의가 활발하다.
이재명 정부의 국정과제에도 반려동물 진료 표준수가제 도입이 포함되면서 사회적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진료비에 대한 보호자 불신을 줄이고, 수의사의 적정 보상을 보장한다는 명분이 앞세워지고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표준수가제는 단순히 가격 기준을 정하는 제도가 아니라 수의료 시스템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경쟁 위축과 진료 다양성 감소다. 수의료는 병원 규모, 장비 수준, 전문성, 지역 경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이러한 다양성은 보호자에게 여러 선택지를 제공하며, 병원 간 선의의 경쟁은 진료의 질을 높이는 동력이 됐다. 그러나 표준수가제가 도입되면 동일한 기준이 강제되면서 개별 병원의 차별성과 자율성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영국 RCVS(영국수의사협회)와 미국 AVMA도 “수의료는 자유시장 경쟁을 통해 서비스 질이 보장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정부 주도의 획일적 수가제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

둘째, 행정적 비효율과 행정비용 상승 문제다. 표준수가제를 유지·관리하려면 항목별 기준 설정, 정기적 조정, 이의 신청 처리 등 방대한 행정 절차가 요구된다.

이는 결국 정부 재정 투입과 행정비용 증가로 이어지고,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실제로 사람 의료에서 수가 통제 정책은 건강보험 재정 악화와 의사-정부 간 갈등으로 이어진 바 있다. 수의료에서도 같은 문제가 재현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셋째, 진료비 통제와 서비스 질 저하다. 표준수가제가 도입되면 일부 보호자나 행정기관은 이를 ‘최저가 기준’으로만 해석할 수 있다.
이 경우 수의사는 정해진 금액에 맞추기 위해 서비스 질을 희생하거나 최신 장비와 신약 도입을 주저하게 된다. 

실제로 국내 일부 지자체에서 시행했던 ‘동물진료비 가이드라인’ 사업은 초기에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보호자들이 “가이드라인에 제시된 금액 이상은 지불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서 진료 선택권을 제한하고, 병원 운영에도 제약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넷째, 수의사의 전문성과 직업 자율성 침해다. 표준수가제가 일단 도입되면 정치적·사회적 요구에 따라 점차 가격 통제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이는 의료인의 전문적 판단을 제약하고, 제도적 틀 속에서 진료비가 우선되는 구조를 만들며, 결과적으로 환축에게 돌아가는 의료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찬성론자들이 강조하는 “투명성과 신뢰 확보”는 반드시 표준수가제를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진료비 공개제도(사전고지제), 진료 항목 표준화(수술·진료 기록 표준 코드화), 민간 자율 가이드라인 등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실제로 미국 AAHA(미국동물병원협회)는 ‘진료비 공개 및 설명 의무’를 강화하면서도 가격 통제에는 반대하고, 병원별 자율 가이드라인 제공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강제적이고 획일적인 표준수가제가 아니다. 오히려 병원 간 덤핑 경쟁을 막고 보호자의 혼란을 줄이면서도 수의사의 전문성을 존중할 수 있는 자율적이고 유연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표준수가제는 언뜻 단순한 해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큰 문제를 만들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수의사와 보호자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획일적 가격 규제가 아닌 자율과 경쟁 속에서 형성되는 신뢰 구조를 선택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