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호 교수의 영화이야기 (22)] 어쩔수가없다(2025)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기최면의 블랙코메디
올 해 가장 기대하고 개봉일만 기다렸다 본 첫 영화가 바로 박찬욱 감독의 이 작품이다. 실제 맞춤법을 따르려면 ‘어쩔 수가 없다’라고 해야 할 것이나 감독은 그냥 뭔가 입에 붙어 하나의 단어처럼 중얼거리게 되는 이 문구를 하나의 단어처럼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영화제목과 달리 모든 상황은 어쩔 수 없지 않다.
이병헌이 역할을 한 유만수라는 인물이 주인공인데 아름다운 아내 이미리(손예진 분)와 두 아이를 둔 가장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한 순간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재취업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사람이다.
유만수에 의해 제거되는 인물은 이성민이 분한 구범모, 차승원이 분한 고시조, 박희순이 분한 최선출 이렇게 총 3명인데 이들은 모두 유만수가 상상하는 또 다른 자아를 상징한다.
구범모는 현재 알콜중독 및 아내의 외도로 고통받는 실직자인데 만수 또한 알콜중독 이력이 있고 매력적인 아내가 한눈팔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는 상황으로 이러한 만수의 심리가 투영되어 있는 자아이다. 고시조는 만수와 마찬가지로 제지업계 기술자였지만 해고당한 후 구둣가게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사춘기 딸과 관계가 매끄럽지 않아 보이는 인물로 해고 후 제지업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폐 성향의 딸을 키우는 만수에게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자아로 보인다.
이 둘과 다르게 최선출이란 인물은 잘나가는 제지 회사의 팀장으로 만수에게 있어서는 선망의 대상이다. 아내와 떨어져 혼자 섬에 전원주택을 짓고 유투버로 활동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은 만수가 원하는 또다른 삶일 수도 있다.
이 셋을 제거하는 이유와 방식은 조금 차이가 있는데 구범모와 고시조는 만수가 바라지 않는 지난 과거 또는 현재를 의미하기에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구범모는 범모의 아내 아라(염혜란 분)가 실제 살해하게 되는데 이는 만수가 자신의 아내 미리 또한 외도를 하지 않을까 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함께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범모라는 이름 또한 재미있는데 감독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해당 분야에서 모범적으로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고시조는 만수와 달리 제지 전문가의 길을 포기한 사람으로 만수가 해고 뒤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상황을 연상하는 인물이다. 그러한 고시조를 제거함으로써 만수는 제지 전문가 외의 길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는 말하자면 돌아갈 길을 없앤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조는 사실 만수의 현실을 가장 비슷하게 반영한 인물로 볼 수도 있는데 이름 자체가 만수의 원형이라는 의미는 아닐까 싶었다. 반면 최선출은 만수의 워너비와 같은 사람으로 이 사람을 제거해야 만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기에 만수는 그를 흉내내고 그와 친해지려고 하며 함꼐 술을 마신 후 제거하게 된다. 선출이란 이름은 만수의 희망을 반영한 이름일 것이다.
모든 배우의 연기가 좋았으나 단연 염혜란과 손예진이 돋보인다. 특히 염혜란 배우의 뱀독을 제거하는 모습 등 도발적인 연기는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 새로웠으며, 손예진 배우의 색기 넘치고 능청스런, 그러나 가족을 위해 일관된 강단 있어 보이는 연기 또한 일품이다.
자폐 성향이 있는 만수의 딸과 만수의 시신 매장을 목격한 아들 또한 다양한 암시를 주는 장치인데 이들의 역할과 행동에 대해서는 관객이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이 다양할 수 있을 것 같다. 결말은 권선징악이나 교훈과는 거리가 먼 냉소적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며 끝나는데 이 점이 어떤 관객들에게는 개운하지 않은 마무리로 보일 수도 있고 혹자에게는 박찬욱 버전의 기생충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그간 나왔던 박찬욱 세계관 상위권에 있는 영화라 생각하며 관람 추천은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