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Ⅰ] 동물용 의약품 처방권, 법과 현실의 간극
“수의사의 진료 주권 최소한의 안전 장치”
동물용 의약품을 둘러싼 수의사와 약사 간의 역할 경계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현행 「수의사법」과 「약사법」은 분명 각 직역의 권한을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법의 취지와 다른 방식의 의약품 유통과 사용이 반복되고 있다. 특히 약국에서의 동물용 의약품 판매와 보호자의 자가 투약이 늘어나면 수의사의 진료 권한과 동물 복지, 더 나아가 공중보건까지 영향을 받는 구조가 고착화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편집자주>
<신년기획>
Ⅰ. 동물용의약품 처방권, 법과 현실의 간극
Ⅱ. 선진국 사례로 본 동물약 유통 모델
Ⅲ. 처방권 논쟁 속 수의사 진료 주권 지키기 전략
법이 정한 경계 “현실은 달라”
현행 법체계에서 동물용 의약품의 처방·조제·판매 권한은 수의사와 약사에게 명확히 구분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항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해석의 여지가 적지 않다.
수의사에 대해서는 「수의사법」 제12조에 따라 직접 진료 후 동물용 의약품을 처방할 수 있으며, 농림축산식품부 고시에 따라 처방대상 동물용 의약품에 대해서는 처방전 발급이 전제된다.
조제의 경우 「약사법」 부칙(법률 제8365호)에 따라 수의사가 자신이 치료용으로 사용하는 동물용 의약품을 직접 조제하는 행위는 허용돼 있다. 판매 역시 「약사법」 제47조 및 제85조, 「동물용 의약품등 취급규칙」에 따라 동물병원 개설자는 진료 후 의약품을 판매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문제는 약국이다.
약국 조제 가능 여부 “법 해석 엇갈려”
약국의 동물용 의약품 취급을 둘러싼 직역 간 해석 차이는 분명하다. 대한수의사회는 「약사법」 제48조(개봉판매 금지)와 「동물용 의약품등 취급규칙」 제22조3을 근거로 약국에서 동물용 의약품을 개봉해 조제하는 것은 금지된다고 본다. 즉, 약국은 원칙적으로 ‘조제’ 행위를 할 수 없다는 해석이다.
반면 대한약사회는 「약사법 시행규칙」 제13조를 근거로, 수의사 처방전이나 공정서에 따라 약사가 동물용 의약품을 조제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판매와 관련해서는 더 복잡하다. 「약사법」은 약국이 수의사 처방 대상인 주사용 항생제와 주사용 생물학적 제제(백신)를 제외한 다수의 동물용 의약품을 수의사 처방전 없이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처방 대상 동물용 의약품이라 하더라도 주사용 항생항균제와 주사용 생물학적 제제(백신 등)를 제외하면 약국 구매가 가능한 구조가 형성돼 있다.
수의계는 “법 조문만 놓고 보면 합법의 영역처럼 보이지만, 실제 사용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수의사에게 돌아오는 구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약국 구매 후 증상 악화 반복되는 문제
동물병원 현장에는 약국에서 약을 구매해 자가 투약한 뒤 증상이 악화돼 내원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보고되고 있다.
대한수의사회와 한국동물병원협회는 과거 이러한 문제를 정리한 ‘동물 자가치료 부작용 사례집’을 제작한 바 있다. 보호자가 임의로 구입한 항생제, 연고, 호르몬제 등을 정확한 진단 없이 사용해 오히려 질병을 악화시키거나 치료 시기를 놓친 사례가 다수 포함돼 있다.
최근에는 실제 사법 판단으로 이어진 사례도 존재한다. 약국에서 인체용 의약품을 조제해 보호자에게 판매한 사건은 약식명령이 내려졌고, 국내 허가되지 않은 동물용 의약품을 판매한 사례 역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바 있다.
한 동물병원 수의사는 “‘약을 바르고 먹였더니 더 심해졌다’는 보호자들의 호소를 거의 매주 접한다”며 “이 문제는 단순한 직역 갈등이 아니라 환자의 안전 문제”라고 말했다.
국감 지적 이후에도 정책은 여전히 ‘진행형’
이 같은 문제는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됐다. 약국에서 판매 가능한 동물용 의약품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되면서 농림축산식품부와 보건복지부가 협의에 착수했다.
정부는 약국 판매가 제한되는 동물용 의약품 범위를 축소하는 방향성에는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구체적인 실행안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사안은 「약사법」 개정이 필수적인 구조여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논의 결과가 핵심 변수로 남아 있다.
현재 이 과정에서 대한약사회는 반대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편리성과 전문성, 선택 문제 아냐
보호자들이 약국 구매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편리성이다. 접근성이 좋고, 동물병원 방문 없이 약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러나 수의사들은 이 편리성이 동물의 건강과 복지를 담보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수의사법」상 동물의 자가진료는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으며, 사회 통념상 허용되는 범위는 경미한 투약이나 연고 도포 수준에 그친다. 주사 등 침습적 행위는 명백히 불법이다.
실제로 사법부는 동물보호단체가 선의로 비타민제를 주사한 행위조차 무자격 의료행위로 판단한 바 있다.
대한수의사회 측은 “수의사는 법에 따라 동물의 건강과 복지 향상을 책임지는 전문직”이라며 “편리함보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진단과 책임 있는 처방이라는 메시지를 사회에 지속적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논쟁의 핵심은 단순히 약을 팔 수 있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동물의 진단부터 치료, 처방, 예후 관리까지 이어지는 의료의 연속성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법과 현실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한, 현장의 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수의사의 진료 주권은 직역 이기주의가 아니라 동물 복지와 공중보건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는 점을 다시 짚어볼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