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Ⅱ]  선진국 사례로 본 동물약 유통 모델

직역간 이해 아닌 ‘진료 주권과 책임’ 문제 해외는 예방적 항생제 사용 금지 원칙…치료 목적도 반드시 수의사 처방 거쳐야

2026-01-26     손지형 기자

<신년기획>
Ⅰ. 동물용의약품 처방권, 법과 현실의 간극
Ⅱ. 선진국 사례로 본 동물약 유통 모델
Ⅲ. 처방권 논쟁 속 수의사 진료 주권 지키기 전략

반려동물 진료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동물용 의약품의 유통과 처방을 둘러싼 논의도 전환점에 서 있다. 특히 항생제 내성 문제, 자가투약에 따른 부작용, 공중보건 리스크가 전 세계적으로 부각되면서 주요 국가들은 동물용 의약품 관리 체계를 ‘접근성 중심’에서 ‘전문가 통제 중심’으로 재정비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국제적 흐름을 근거로 한국 역시 동물용 의약품 정책을 수의사의 진료 판단을 중심으로 재정립해야 할 시점이다.
 


■ EU, 사전 통제와 사후 관리 강화
유럽연합(EU)은 이 같은 변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EU는 「동물용의약품 규정(Regulation (EU) 2019/6)」을 통해 동물용 의약품의 허가·유통·처방·감시 체계를 전면 개편했다. 이 규정은 2022년부터 본격 시행됐다. 핵심은 항생제 사용의 사전적 통제와 사후적 감시 강화다. 

예방적 항생제 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치료 목적일 경우에도 반드시 수의사의 임상적 판단과 처방을 거치도록 했다. 단순히 약을 구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약물이 사용되는 전 과정에서 수의사의 진료 책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대한수의사회는 이 점에 주목한다. EU의 정책 기조는 동물용 의약품을 일반 소비재가 아닌 ‘의료 행위의 일부’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일부 EU 회원국과 아일랜드 등에서는 기존에 허용되던 비처방 판매 범위를 축소하거나 예방 목적 사용을 단계적으로 제한하는 정책 전환도 진행 중이다. 이는 항생제 내성 관리라는 공중보건 목표와 동물복지 증진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 미국, 수의사 진단과 처방 전제
미국 역시 규제 방식은 50개 각 주별로 다르지만 기본 원칙은 명확하다. 동물용 의약품은 수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전제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수의사-고객-환자 관계(VCPR)’를 제도의 핵심으로 두고, 이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처방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항생제와 호르몬제 등 주요 전문의약품은 물론 사료첨가제 성격의 약물까지도 수의사의 관리 하에 두는 방향으로 규제가 강화돼 왔다. 대한수의사회는 이러한 제도가 약국이나 유통 주체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료 책임의 주체를 명확히 하기 위한 장치라는 점을 강조했다.

■ 한국형 모델 시급
반면 한국의 동물용 의약품 유통 구조는 여전히 과도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 현행 「약사법」과 관련 규정에 따라 주사용 항생제와 주사용 백신을 제외한 상당수 동물용 의약품은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판매가 가능하다. 정부 역시 약국 판매 예외 규정을 단계적으로 조정하겠다는 방향성은 제시했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다. 

대한수의사회는 이 같은 제도적 공백이 현장에서 혼란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보호자의 편의성을 이유로 한 약국 구매가 반복되면서 수의사의 진단 없이 항생제나 호르몬제가 사용되고 증상이 악화된 뒤 동물병원을 찾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 대수회 측의 설명이다. 

이는 단순한 진료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항생제 내성 증가와 동물복지 저하, 나아가 공중보건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적 문제라는 지적이다. 

대한수의사회 관계자는 “해외 주요 국가들이 규제를 강화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동물용 의약품은 반드시 전문가의 판단 아래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대수회는 한국형 모델 역시 해외 사례를 단순히 모방하기보다 국내 현실에 맞는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본다. 보호자의 접근성을 완전히 차단하는 방식이 아니라 수의사의 진료를 전제로 한 합리적인 유통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처방대상 품목의 단계적 확대, 진료기록 관리 강화, 보호자 대상 교육과 홍보가 병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이 논의의 본질은 직역 간 이해관계가 아니라 진료 주권과 책임의 문제다. 대한수의사회는 동물의 건강과 복지를 최우선 가치로 삼는 「수의사법」의 목적을 다시 한 번 환기하며, 동물용 의약품 정책 역시 그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재정비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EU 주요국들이 이미 선택한 길은 분명하다. 편의성보다 전문성, 판매보다 진료, 그리고 시장 논리보다 공중보건과 동물복지를 우선하는 방향이다. 이제 한국 수의계가 그 흐름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가 중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