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30일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위원회가 주요 동물보호단체들과 간담회를 열고, 이재명 정부의 동물복지 분야 국정과제 수립 방향을 논의했다. △동물복지기본법 제정 △동물복지진흥원 설립 △동물학대자 사육금지 제도 도입 등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고, 동물병원 ‘표준수가제’ 도입도 간접적으로 언급되며 수의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슈들도 논의됐다. 그러나 이 간담회는 동물보호단체와 시민단체만이 참석했고, 수의사 단체나 임상 현장 수의사의 참여는 없었다.
국정기획위원회는 대통령 직속 전략 컨트롤타워로 향후 5년간 정부 정책의 청사진을 그리는 핵심 기구다. 이 중요한 정책 설계의 첫 테이블에 수의계가 아예 초대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수의계 내부에서는 “정부의 동물복지 정책을 실행하는 것은 결국 수의사의 몫인데, 왜 설계 단계에서는 배제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논의가 복지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향후 다른 동물관련 정책 결정에서도 같은 방식의 배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수의사 빼고 수의료정책 논의하는 정부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반려동물 진료비 부담 완화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며 △표준수가제 도입 △펫보험 활성화 △진료비 부가세 면세 확대 △공공동물병원 확충 등을 약속한 바 있다. 이 정책들은 모두 수의사의 진료 현실과 동물병원 운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안들이다.
수의계는 특히 표준수가제에 대해 “진료 현실을 반영하기 어렵고, 획일화로 인해 진료 질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며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해온 바 있다. 그럼에도 관련 논의에서 수의계와의 협의가 이뤄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사실 수의계가 정책 설계 과정에서 배제되는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22년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수의사법 개정안이 수의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를 통과한 바 있다.
당시 개정안은 중대 수술에 대한 진료비를 사전·사후 고지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수의계는 현실을 무시한 졸속 입법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대한수의사회는 성명을 통해 “동물진료비 폭등을 유발할 수 있는 위험한 개정”이라고 경고했지만,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살처분 정책, 감염병 대응 등에서도 수의사의 전문성이 묵살된 사례가 되풀이 되고 있다.
지금도 수의사회는 표준수가제 도입이나 진료비 공개와 같은 정책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으나 정책에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통로나 협의 구조는 여전히 부재한 상태다. 결국 수의사는 정책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직접적인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책을 설계하는 과정에서는 참여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돼온 수의사 패싱 원인은?
수의계가 정책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배제되는 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물복지나 반려동물 관련 정책이 점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로 확대되면서 정부는 여론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동물보호단체나 시민단체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구조가 형성됐다. 이들 단체는 오랜 시간에 걸쳐 대중과 정치권을 상대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반면 수의계는 조용한 태도를 유지해왔다. 실제로 대중들을 설득할 만한 메시지를 만들고 여론을 형성하는 데에는 미온적이었다. 애초에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공식 구조 자체가 없다는 것도 문제다.
수의사회 내부에도 정책 협상에 집중할 전담 조직이나 전략 체계는 전무한 실정이다. 전문성은 충분하지만 정치권, 시민사회에 의견을 전달하는 창구는 없는 셈이다.
그 결과 수의계의 입장은 대부분 정책이 확정되고 난 이후에야 성명서나 논평을 통해 입장을 밝히는 방식의 사후 대응에 머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공식 참여로 정책 파트너 돼야
이제는 ‘수의사도 말은 했다’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정책 설계 초기 단계부터 수의계의 공식 참여 구조를 제도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수의사회가 정부 부처와의 공동 위원회나 자문단에 정식 참여하는 방식, 임상 현장에서 수집된 진료 데이터와 리스크 평가를 정책 기획에 반영할 수 있는 경로가 필요하다. 실제로 일부 수의단체에서는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자’는 조언도 나오는 상황이다 .
수의사는 단순히 진료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동물복지 정책을 실현하는 핵심 실행자이자 현장 전문가다. 정책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전략과 협상력, 대외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갖추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야 한다.
물론 동물관련 정책이 수의사만의 영역은 아니다. 그러나 수의사가 정책 구조 안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남는다면 그 실현 가능성과 현장감도 함께 퇴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수의계가 정책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구조를 스스로 요구하고 만들어야 할 때다.